세계 경제학의 그 논리를 탐하다

개인이 취할 수 있는 대안적 기회의 몇 가지 차원, 예컨대 자산 소유자와 비소유자 간의 구별 등은 오래 전에 확립된 것이며 지금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다른 차원, 예컨대 노예노동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 등은 비교적 최근에 확립된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차원이 이따금 필요에 따라 제정되고 있다. 실제로 경제학은 이기의 의미 변천 역사이면서 또한 개인에게 열려 있는 기회의 변천사이기도 하다.

자유선택의 기회가 어떻게 주어졌고 그것이 어떤 영향을 받게 될 것인가가 경제학이 다룰 수 있는 실용적 과제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30년 전에 나는 러셀현인재단의 연구비 지원을 받아서 학생 세 명과 함께 2년간 피츠버그에 있는 미국철강주식회사 공장실태조사를 한 적이 있다. 출발 전에 나는 소비자연맹의 플로렌스 켈리 대표에게서 유에스스틸사의 근로자는 일요일에도 24시간 근무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에겐 이것이 터무니 없는 말처럼 들렸다.

당시 철강산업에 대해 값싼 유럽의 노동으로부터 미국의 노동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있었고 나 역시 이에 동조하였으며 철강수입에 대해 보호관세 조치가 취해져 철강산업은 정책적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 보호관세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보고 있던 당사는 경영층이 선임한 안내인을 동반하지 않으면 방문자의 공장 시찰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오늘날에도 이 규칙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내 학생들을 데리고 공식 안내인 없이 공장 실태조사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내 친구 말론 갈랜드는 1892년 홈스테드 지역 파업을 주도한 노조 간부였으며 그 파업투쟁에 실패한 뒤 공화당 정부에 의해 피츠버그 관세청장으로 임명되어 당시까지 재직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그에게 카네기 사장한테서 그를 안내인으로 하여 다음 일요일 밤 홈스테드 공장을 시찰할 수 있는 허가를 얻어주도록 부탁했다. 그는 해냈고, 우리와 동행하면서 그가 15년 전인 1892년에 연좌농성 중인 노동자에게 열변을 토했던 그 장소로도 안내해 주었다. 파업자 중 몇몇은 복직되어 당시에도 재직 중이었으며, 그들은 그를 알아보고 우리 일행을 환영해 주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뜨거운 용광로의 문을 개폐하는 ‘화부’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 용광로 안에는 거대한 쇳물이 다음의 압연과정을 위해 제련되고 있었다. 그는 쉰살 전후로 보였으며 웃통을 허리까지 벗고 있어서 용광로의 열기로 붉게 달아오른 그의 왼팔뚝을 훤히 볼 수 있었다. 그때가 일요일 저녁 11시였다. 그는 일요일 아침 6시에 출근하였으며 다음날 아침 6시에 퇴근하게 되어 있었다. 지난 주에는 12시간 주간 교대근무를 했기 때문에 이번 주에는 추가로 12시간 야간 교대근무를 하게 된 것이었다. 터무니 없는 일로 생각했던 24시간 근무가 실제로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거대한 용광로 문을 여닫는 어간에 친구를 대하듯 솔직하게 우리에게 얘기해 주었다. 슈워브처럼 능력 있는 사람은 모진 개인주의를 극복할 수 있었지만 그런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 용광로 화부는 값싼 이민 노동자가 아니라 지적인 미국 시민이었고 고임금 소득자에 속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이 지적인 노동자가 하루 12시간씩의 2교대 근무를 하지 않으면 실업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우리는 노동조합대회 보고서에서 1889년에 카네기 사장이 노동조합에 대하여 제강 기술이 교련법 수준에 머물러 있던 아주 오래 전부터 채택해 온 하루 10시간 근무제 대신에 하루 8시간 3교대제를 제안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카네기 사장은 24시간 연속 조강생산방식을 개발하여 특허를 확보하고 있었다. 노조지도자들은 3교대 연속생산 공정방식에 적극 찬성하였지만 노동조합대회에서 이를 거부해 버렸다. 3년 뒤 1892년에 카네기 사장의 동료 프릭은 회사의 무노조 방침에 따라 홈스테드 철강공장 노동조합을 철폐하고, 군대의 도움을 받아 주당 7일 내내 하루 12시간을 근무하고, 한 일요일을 24시간 쉬면 그 다음 일요일엔 24시간 근무하는 방식을 규칙으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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